무왕 (백제)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무왕은 백제의 제30대 왕으로, 삼국 시대에 신라와 대립하며 수나라와 당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등 외교 관계를 맺었다. 재위 기간 동안 신라를 여러 차례 공격하고, 수나라에 고구려 공격을 요청했으며, 당나라로부터 대방군왕 백제왕으로 책봉되었다. 602년에 미륵사를 창건하고 사비 궁궐을 수리하는 등 토목 사업을 추진했다. 무왕은 641년에 사망했으며, 익산의 쌍릉이 그의 능으로 추정된다. 무왕의 출생과 가계에 대한 기록은 여러 설이 존재하며, 신라 선화공주와의 로맨스를 다룬 서동 설화가 전해진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백제 무왕 - 서동요
서동요는 백제 무왕의 아명인 서동이 신라 선화공주를 얻기 위해 노래를 지어 퍼뜨린 설화로, 미륵사 창건, 익산 천도 등과 연결되어 다양한 해석과 논란을 낳고 있다. - 백제 무왕 - 익산 쌍릉
익산 쌍릉은 백제 무왕의 능으로 추정되는 익산시 왕궁면 소재의 백제 후기 왕릉으로, 대왕릉에서 발견된 유골 분석 결과가 무왕의 기록과 일부 일치하나, 무왕릉 확정 여부 및 소왕릉 주인공에 대한 추가 연구와 익산 천도설 관련 논쟁이 남아있다. - 641년 사망 - 조메이 천황
조메이 천황은 일본의 제34대 천황으로, 소가 씨의 지지를 받아 즉위하여 당나라와 교류를 시작하고 백제 문화를 장려하였다. - 641년 사망 - 콘스탄티노스 3세
콘스탄티노스 3세는 헤라클리우스 황제의 아들이자 641년 짧게 동로마 제국의 황제였으며,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제국 내 권력 다툼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 7세기 한국의 군주 - 선덕여왕
선덕여왕은 신라 최초의 여왕으로, 진평왕의 딸로 태어나 화백회의에서 추대되어 즉위하여 재위 기간 동안 당나라와의 외교 강화, 불교 진흥, 황룡사 9층 목탑 건립, 첨성대 축조 등의 업적을 남겼으나 백제와 고구려의 침략, 비담의 난을 겪고 승하하였으며, 뛰어난 통찰력과 예지력을 보여주는 일화가 전해진다. - 7세기 한국의 군주 - 문무왕
문무왕은 신라의 제30대 국왕으로 삼국 통일을 완수하고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통일 신라의 기틀을 다졌으며, 중앙 집권 체제 강화, 불교 장려 등의 정책을 통해 신라의 안정과 발전에 기여한 군주이다.
무왕 (백제)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무왕 |
한자 | 武王 |
로마자 표기 | Mu-wang |
출생명 (한글) | 장, 무강 또는 헌병 |
출생명 (한자) | 璋, 武康 or 獻丙 |
출생명 (로마자 표기) | Jang, Mugang 또는 Heonbyeong |
아명 (한글) | 서동 |
아명 (한자) | 薯童 |
아명 (로마자 표기) | Seodong |
왕조 | |
국가 | 백제 |
재위 기간 | 600년 ~ 641년 |
즉위 | |
즉위 년도 | 600년 |
생애 | |
출생 추정 년도 | 581년경? |
출생지 | 백제 |
사망 및 매장 | |
사망 년도 | 641년 |
사망 장소 | 백제 |
매장지 | 익산 쌍릉 |
가족 관계 | |
부왕 | 위덕왕 |
모후 | 미상 |
배우자 | 선화공주 (실존 여부 논란), 사택씨 |
자녀 | 의자왕, 부여교기의 아버지, 부여새상 |
왕위 계승 | |
이전 국왕 | 법왕 |
다음 국왕 | 의자왕 |
기타 정보 | |
칭호 | 어라하 |
종교 | 불교 |
2. 생애
607년 및 608년 무왕은 수나라에 조공함과 동시에 고구려 토벌을 청하는 상표문을 제출했고, 611년에는 수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선두에 설 것을 자청했다. 한편으로는 고구려와의 외교 관계도 유지하여, 612년 수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했을 때 백제가 군사적으로 수나라에 협력하지 않았다. 신라와는 가야 제국의 지배권을 놓고 분쟁이 끊이지 않아, 602년 8월에는 출병하여 신라의 아막산성(전라북도 남원시)을 포위했으나, 신라 진평왕이 파견한 기병대에 대패했다. 611년 10월에는 椵岑城중국어(충청북도 괴산군)을 빼앗았고, 616년에도 모산성(충청북도 진천군)을 공격했다. 618년에 椵岑城중국어은 신라에 탈환되었지만, 그 후에도 동성 주변에서의 소규모 교전이 계속되었다.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흥하자, 621년에 조공했고, 624년에는 '대방군왕·백제왕'으로 책봉되었다. 626년에 고구려와 화친을 맺고, 신라를 여러 차례 공격했다. 627년에는 신라의 서부 2성을 빼앗고, 더 나아가 대군을 파견하려 하여 웅진에 병력을 모았다. 신라의 진평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태종에게 중재를 요청했고, 무왕은 조카인 귀실복신을 당나라에 파견하여 중재를 받아들였지만, 그 후에도 신라와의 분쟁은 계속되었다.
아버지 법왕이 건립을 시작한 왕흥사(충청남도 부여군)를 634년에 완성했으며, 미륵사(전라북도 익산시)를 건립했다.
641년 3월에 사망했고, 무왕으로 시호되었다.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그 죽음을 알리자, 태종은 곡읍(哭泣)의 의례로 애도했고, 무왕에게는 광록대부의 작호가 추증되었다.[18]
2. 1. 출생과 가계
무왕의 출생 배경과 가계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관련 기록은 사서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삼국사기》는 무왕을 법왕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삼국유사》는 과부의 아들이라고 전한다.[14] 《삼국유사》에 따르면, 무왕은 못가에 사는 여인의 자식으로, 무왕의 어머니는 못가에 사는 과부였는데 어느 날 못에서 검은 용이 나타나 과부와 관계하여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그 아들이 자라서 재주가 뛰어나고 용맹스러웠는데, 그가 왕위에 올라 무왕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전라도 익산에는 무왕이 연못에서 사는 용의 아들이라는 탄생 설화도 전해 내려온다.그러나 법왕의 아들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중국의 구당서와 당나라로 끌려간 백제 유민들의 묘비석에는 부여관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일본의 신찬성씨록이나 도요타씨, 오우치씨의 족보에는 진이왕으로 나타난다. 진이왕 부여관이 위덕왕, 혜왕, 법왕과 어떤 관계인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마를 캐서 팔던 무왕이 신라로 넘어가 선화 공주를 모함하는 내용의 서동요를 퍼뜨렸고, 이로 인해 선화 공주가 유배될 때 함께 가서 결혼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2. 2. 신라와의 전쟁
600년 법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무왕은 신라와 자주 충돌하였다. 602년 신라의 아막산성(阿莫山城)을 공격하였으나 크게 패하였다.[15][16] 611년 10월 가잠성(椵岑城)을 공격하여 100여일만에 빼앗고, 616년에는 모산성(母山城)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623년 가을에는 늑노현(勒弩縣)을 침범하였다. 633년 음력 8월 서곡성(西谷城)을 점령, 636년 5월 장군 우소(于召)에게 명령하여 독산성(獨山城)을 습격하였으나 패하였다.627년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 침공을 시도하였으나, 당 태종이 백제와 신라의 화친을 권유하여 이를 포기하였다.
2. 3. 수, 당과의 관계
무왕은 고구려의 남진을 견제하기 위해 607년 및 608년에 중국 수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여러 차례 고구려 공격을 청하였다.[3] 611년 수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선두에 설 것을 자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612년 수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했을 때 백제가 군사적으로 수나라에 협력하지는 않았다. 한편으로는 고구려와 외교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다.[3]618년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건국된 뒤에도 621년에 조공하는 등 친선 정책을 전개하여, 624년에는 '대방군왕·백제왕'으로 책봉되었다.[3]
2. 4. 기타 정책
602년 관륵을 왜에 파견하여 천문, 책력, 지리, 둔갑방술(遁甲方術) 등에 관한 책을 전하고, 불교를 전파하였다.[3] 630년 사비궁을 화려하게 수리하였으나 가뭄으로 중지되었다.[17] 634년 왕흥사를 창건하고[17] 궁남지를 건설하였으며, 막대한 인력을 징발하여 전라도 익산에 미륵사를 조성하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였다. 무왕은 익산 천도를 통한 귀족세력의 재편성을 시도했다. 비록 천도는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관산성 전투 패배 이후 약화된 왕권이 무왕 때 다소 회복되었다. 이는 의자왕이 즉위 초기에 정치적 개혁을 통해 전제 왕권을 구축하는 기반이 되었다.2. 5. 최후
641년 음력 3월에 무왕이 사망하였다. 당 태종은 소복을 입고 통곡하였으며 현무문(玄武門)에서 애도식을 거행하였고 광록대부를 추증하였다고 한다.[18]무왕의 능은 익산시 팔봉면 신왕리에 있는 쌍릉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고려시대에 이미 도굴된 적이 있는 쌍릉은 1916년에 조사되었는데, 그에 따르면 사비시대 능산리 고분의 묘제와 일치함이 밝혀졌다. 무왕의 능을 통해 그가 익산 태생이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익산을 중시했던 점을 고려해 볼 수 있다. 인골 분석 결과 무왕은 60세 전후에 사망했으며, 키는 161~170.1cm 사이이고, 사망 연도는 620년에서 659년 사이로 추정된다.[5][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8/0002418047?sid=103]
3. 서동 설화
고려 시대 승려 일연이 편찬한 삼국유사에는 서동 출신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 이야기가 나온다. 익산 미륵사지 서탑 해체 중 금동사리함 명문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일연의 삼국유사를 기반으로 미륵사 창건이 선화공주가 중심이 됐다는 설이 지배적이었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紀異)편에 실린 설화에 따르면, 서동은 신라 진평대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서라벌로 들어가 동네 아이들에게 마를 나눠 주며 동요를 지어 불렀다. 아이들에게 부르게 한 노래는 다음과 같다.
선화 공주님은
남 몰래 짝을 맞추어두고,
서동 서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이 동요는 널리 퍼져 궁궐까지 이르게 되었고, 노래 내용이 사실이라고 믿은 모든 관료들의 주장에 따라 공주는 먼 지방으로 귀양가게 되었다. 길을 떠날 때 왕후는 순금 한 말을 여비로 주었다. 공주가 유배지로 가는 도중 서동이 나타나 절을 하고는 자신이 모시겠다고 하였다. 공주는 그가 어디서 왔는지 몰랐지만, 뜻밖에도 믿음직하여 마음에 들어 그를 따라가 몰래 정을 통하였다. 그런 뒤에야 서동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동요의 내용을 진심으로 믿게 되었다.
하루는 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행차하던 중, 용화산 아래 큰 연못가에 이르렀다. 그때 미륵삼존이 연못 속에서 나타나자 왕은 수레를 멈추고 경의를 표하였다. 부인이 왕에게 "이곳에 큰 절을 짓는 것이 진실로 제 소원입니다"라고 말하자, 왕은 이를 허락하였다. 지명법사에게 연못을 메우는 일을 묻자, 법사는 신통력으로 하룻밤 만에 산을 무너뜨려 연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미륵삼존의 모습을 본떠 전각, 탑, 회랑을 각각 세 곳에 만들고 미륵사(彌勒寺)라 하였다. 진평왕은 수많은 장인들을 보내어 절을 짓는 일을 도왔는데, 지금도 그 절이 남아 있다.
그러나 2009년 1월 14일, 미륵사지 서탑 해체 중 발견된 금동사리함 명문에 의해 역사학계에 파문이 일었다. 사리함 명문에는 '우리 왕후께서는 좌평 사탁적덕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에 선인을 심어 금생에 뛰어난 과보를 받아 만민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불교의 동량이 되셨기에 능히 정재를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시고, 기해년(639년)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라고 적혀있다.
미륵사지 석탑 준공 당시 무왕의 왕비는 선화공주가 아니라 좌평 사택적덕의 딸 사택왕후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 때문에 선화공주와의 결혼은 후대에 꾸며진 허구라는 주장이 나왔다. 그러나 역사학계에서는 당대 왕들이 일반적으로 2명의 왕비를 두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설화적 요소가 더해졌더라도 섣부른 결론은 지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19] 삼국유사에는 무왕이 신라 공주와 결혼했다는 전설이 전해지지만, 역사학자들은 라이벌 국가 간의 적대적인 관계를 고려할 때 사실일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6] 이 이야기에서 어린 서동(무왕의 어린 시절 이름)은 신라 선화공주와 사랑에 빠져 공주와 자신에 대한 노래를 의도적으로 백성들 사이에 퍼뜨렸고, 이 노래("서동요") 덕분에 신라 진평왕은 공주를 유배 보내고, 무왕은 그녀와 결혼하여 백제의 왕이 된다.
4. 가계
5. 대중 문화 속의 무왕
참조
[1]
서적
삼국유사
[2]
서적
Samguk Yusa: Legends and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of Ancient Korea
Silk Pagoda
[3]
백과사전
네이버 백과사전
https://archive.toda[...]
[4]
웹사이트
Brilliant Baekje - Iksan, Unrealized Baekje People's dream
https://web.archive.[...]
2022-01-15
[5]
웹사이트
Royal tomb in Iksan likely belongs to King Mu of Baekje
https://en.yna.co.kr[...]
2024-01-14
[6]
서적
Samguk Yusa: Legends and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of Ancient Korea
Silk Pagoda
[7]
서적
Nihon Shoki
[8]
백과사전
사택왕후(沙宅王后)
http://encykorea.aks[...]
[9]
웹사이트
학계에서는 무왕이 익산 왕궁에서 사망한 것으로 본다.
https://kiss.kstudy.[...]
[10]
논문
익산 쌍릉과 출토 인골의 성격에 대한 연구
http://www.riss.kr/s[...]
한국고고학회
[11]
뉴스
“백제 무왕이십니다”…뼛조각에 학자들 고개 숙이다
http://www.hani.co.k[...]
2019-02-23
[12]
뉴스
쌍릉에서 발견된 무왕의 유골 나이가 60대 이상이었다.
https://n.news.naver[...]
[13]
서적
삼국사기
[14]
서적
삼국유사
[15]
서적
일본서기
[16]
서적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도서출판 범한
[17]
서적
삼국유사
[18]
서적
동사강목
[19]
웹사이트
http://www.hani.co.k[...]
[20]
서적
일본서기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